성소수자 부모모임 15차 정기모임 대화록
2016-05-12 오후 20:31:31
성소수자 부모모임 열다섯 번째 정기모임 이야기 정리
일시: 6월 20일 토요일 7시
장소: 서울 마포구
참석:
- 지인: 게이 아들을 둔 어머니
- 라라: MTF 트렌스젠더를 자녀로 둔 어머니
- 무애: 게이 아들을 둔 어머니
- 해인: 게이 조카를 둔 이모
- 오소리: 양성애자(누나가 알고 있음)
- 수환: 게이(부모님과 누나가 알고 있음)
- 바람: 범성애자(부모님과 형이 알고 있음)
- 어나더: 게이(부모님이 알고 있음)
- 밈: 양성애자(가족이 전혀 모름)
- 순재: 게이(어머님이 알고 있음)
- 지환: 양성애자(가족이 전혀 모름)
- 김곰: 이성애자
수환: 반갑습니다. 오늘도 자기소개와 근황나눔을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어나더: 부모님만 아세요. 부모님에게 자의적으로 알려드린 건 아니고 의도치 않게 알려지게 되어서 부모님이랑 사이가 그렇게 좋진 않아요. 부모모임에 온건 저번 달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이런 자리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주중에 알바를 해서 공부를 잘 못해서 기말고사를 망쳤어요. 퀴어블로그가 2주년 되어서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고 학교 퀴어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재밌었어요.
오소리: 스물여섯 살이고 양성애자입니다. 부모님은 모르시고 한달 전에 친 누나에게 커밍아웃을 했어요. 저번 주 토요일에 남자친구와 함께 누나를 만나고 왔어요. 누나가 생각보다 잘 받아주더라구요. 용돈도 주고 맛있는 것도 사줬어요. 오늘도 오자고 했는데 애들 돌봐야 한다고 해서 못 온다고 했구요.
밈: 저는 밈이라고 하고 5월 30일에 처음 행성인에 나왔어요. 가족들에겐 얘기 안했어요. 고백한 사람은 다 여자였고 사귄 사람은 남자라 양성애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대학생이라 저번주에 기말고사가 끝났습니다. 졸업학기여서 고학력 무직자에요.
지인: 저는 여기서 지인이라고 하고, 아이가 남성 동성애자이고, 3년전에 알았고 지금 열 아홉살인데 미국에서 대학교 다니고 있어요. 저희 집은 할아버지 할머니 친구들 몽땅 다 알고 있고, 제가 지금 상담심리사인데, 논문 학기가 한 학기 남아서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무애: 저는 게이 아들을 둔 엄마고 1년 됐어요. 저한테만 커밍아웃을 했어요. 몸이 안 좋아서 이런 모임에 안 나오고 있다가 이번 달에 친구사이 모임에 나가게 되었고, 여기도 오게 되었어요. 너무나 감사하고 배우는 게 너무 많아요. 여기 나오면서 미안한 부분이 엄마가 좀 더 빨리 알아서 함께해줬다면 우리 아이가 힘들지 않았겠구나. 지금 검정고시 하고 있는데, 우리 아이가 검정고시 하면서 ‘엄마 난 살 것 같아. 지옥에서 나온 것 같아.’ 하더라고요. 미술을 전공하는데 게이라는 걸 알아챌까봐 학교 가면 잠만 자는 거예요. 숨이 막혔겠구나. 미안한 걸 느끼고, 아이하고 함께 나오고 싶구요, 여기 갔다 왔다고 하면 아이가 물어만 봐요. 우리 아이가 이런 자리에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게 제 목표입니다.
해인: 저는 무애님 아들 이모예요. 관심이 없는 주제였는데 조카를 보면서 손동작이라던가 그런게 다르잖아요. 근데 조카는 제가 알고 있는걸 알아요. 근데 본인 입으로 이모한테 뭐라고 표현은 안하는 상태예요. 어떻게 자랐는지 너무 잘 아는데, 검정고시를 시작할 때 표정이 너무 밝았어요. 중학교 때 학교에 가면 밥을 안 먹었어요. 아이들이 알아차릴까봐. 그게 너무 슬퍼서 제가 울었어요. 이 모임에 나온다고 우리 아이한테도 말했더니 우리 엄마 멋지다고 그래요. 내가 가진 걸 누군가 알고 있으면 숨이 쉬어지잖아요.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거. 저는 너무 감사해요. 모르는걸 알게 되어서.
라라: 저는 대전에 살고 있고요, 저희 아이가 스물 한 살이고 트랜스젠더 MTF예요. 여성화 수술을 준비하고 있어요. 전에는 여자 같은 남자아이라고 생각하고, 저희 남편이 여성적이에요. 그래서 아빠 닮았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저희 아이도 학교를 다니기 싫어하고 매일 울고 그래서 홈스쿨링 하는 아는 동생이 있어서 홈스쿨링을 하게 했어요. 검정고시를 보고 미용사를 하다가 지금은 미용사를 그만뒀어요. 그런 과정 속에서도 성정체성에 문제가, 아, 문제는 아니죠, 다른 사람과 달라서 적응하느라 힘들었다는 걸 작년에 스무 살 때 알게 됐어요. 확실하게 MTF라는 것도 이 모임을 통해서 알게 됐어요. 우리 아이와 1년 사이에 사이가 굉장히 좋아졌구요. 부모에게서 멀어지려고만 했던 거죠. 자기가 좀 더 자유롭기 위해서. 그랬는데 저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더 가까워졌어요. 전화도 잘 안 받았었고 이야기도 안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본인이 저한테 전화를 더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굉장히 좋아졌고. 최근에 애인을 찼어요. 애인이 정말 잘생겼었고, 이 연애가 끝나면 얘가 죽을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새로 사귀는 친구와 너무 잘 지내고 있어요. 애인이 게이이고, 한 달 정도 됐는데, 그 친구도 보니까 중학교때부터 자기 정체성 때문에 고민이 많았고, 검정고시 하고 미용실에서 예전에 만난 적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서로 아픔을 잘 이해하는 것 같아요. 그 친구랑은 사귀는 거를 그 부모님이 아셔서 그분들이 데리고 가서 밥도 먹고 그런대요. 너무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파트너가 바뀔 가능성은 무지 많지만요. 지금 당장은 좋아 보여요.
백순재: 스물여섯 살 게이에요. 안산에서 대학 다니고 있고, 고향은 전라도 광주입니다. 저는 아홉 살 때 알았고요, 가족 중엔 엄마에게만 커밍아웃했는데, 중2 때가 처음이었고 ’11년 군대 가기 직전에 다시 얘길 꺼냈어요. 사회적으로는 친구 몇 명한테만 말하다가 ’13년 전역 직후 페이스북에 글로 썼고, 그 이후로 완전히 오픈한 채 살고 있습니다. 남동생은 왠지 이미 알 것 같고, 아빠는 모르나 봐요. 그동안은 아빠가 저를 무성적인 존재로 여기듯이 한 번도 여자 얘길 안 했는데, 얼마 전에 빨리 여자 친구 데려 와서 서른 전에 결혼하라고 하셨어요. 그런 말이 난생 처음이라 기분 되게 이상했어요. 슬슬 아빠한테도 고백할 준비를 하면서 돌아보니 부모님이 어떠신지 제가 너무 모르더라고요. 공감을 못하거나 멋대로 단정 짓거나. 그래서 다른 부모님들께 도움 받고 배우러 왔습니다. 이번엔 엄마에게 했을 때보다 잘하고 싶어요. 그땐 아주 서툴렀어요. 언젠가 부모님 모시고 오기 전에 미리 답사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오늘 처음 나왔습니다.
지환: 스물 다섯 양성애자이고, 서울에서 생명공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저는 많이 늦어서 이 성향을 확실히 깨달은게 열 아홉살 무렵이고 군대 갔다오니까 스물 네살에 확실히 이건 안 변하는거다 판단을 내리고서 활동을 시작했어요. 커밍아웃은 고등학교 동창에게만 했어요. 열아홉살 때 형에게 살짝 커밍아웃했는데 지금 완전히 까먹은 것 같아요. 가족에겐 아직은 잘 숨겨지는 것 같아요. 사실 부모님이 컴퓨터만 좀 만지시면 바로 아실 것 같아요. 크롬이 바로 동기화 되잖아요. 최근 한달 동안엔 기말고사 공부를 했어요. 퀴어문화축제 메인파티에 갔었고, 곧 종로에 갈 생각입니다.
바람: 저는 열 네 살 때는 남성 동성애자인 줄 알았어요. 최근 들어서는 젠더플루이드라고 외국에서는 트랜스젠더 그룹에 들어가는 항목이에요. 젠더를 구분하지 않는 성별정체성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제 성적 지향은 범성애자에요. 최근 한 달간은 이번에 젠더퀴어라고 정체화하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저희 집에서 우리 이제 뭐하면 좋을까 하는 주제로 회의하고 그저께 잠깐 사귀던 애인과 헤어졌습니다. 열 일곱살인데 많이 어려요. 부모모임에서 나온 가이드북을 보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다가 커밍아웃을 했는데 잘 안되어서 지금은 헤어진 상태예요. 저는 형한테 폭력을 당한 이후로 혼자 살고 있어요.
백순재: 저는 똘똘한 아이였는지 좀 빨랐어요. 사랑받는 여성을 위한 생활백과 ‘다이아나 여성백과’가 거실 잘 보이는 곳에 있었는데, 엄마는 제가 1권 ‘사랑·결혼·성’만은 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정독했죠. 그렇게 아홉 살 때 성에 눈을 떴고, 거의 동시에 제가 좀 다른 것도 알게 됐어요.
지인: 누구한테 끌려야 아는 거 아니에요?
백순재: 주변사람에게 감정을 느낀 것보다 매체를 통해 성욕을 발견한 것이 먼저였죠. 게이 정체성을 확인하던 순간 중에 가장 인상 깊은 건 ‘푸르넷’ 학습지 부록으로 온 어린이잡지에서 성폭력 예방에 대해 읽을 때였어요. 남자애들이 동네 형이나 아저씨한테 추행당한 사례가 나오는데, 제게는 그게 야설로 느껴지는 거예요. 엎드려서 읽다가 묘한 쾌감을 느꼈어요. 그때 ‘아!’ 했죠. 친구 집에 있는데, 걔네 오빠가 축구하다 땀에 흠뻑 젖어 들어와서는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던 모습도 떠올라요. 크고 단단한 몸, 흙 묻은 팔, 목젖과 가슴 위로 흐르던 우유 같은 거. 그날의 흥분과 긴장이 아마 사람에게서는 처음이었나 봐요. 얼굴도 모르겠는데 지금껏 생각나는 걸 보면요. 선행학습 덕분에 사내아이들 사이에선 성 전도사였어요. 웃긴 게, 학교 은밀한 곳에서 애무를 주고받던 녀석 집에 가 봤더니 안방에 ‘다이아나 여성백과’가 딱! “역시, 너도?!” 그런 경험들이 먼저였고, 누굴 좋아해 본 건 한참 뒤였어요. 중학교 3학년 때 친구를 짝사랑했던 게 처음이에요.
지인: 학창시절에 힘들었던 적은 없었어요?
백순재: 아홉 살이면, 학교를 1년 빨리 가서 초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사실 어렸죠. 처음엔 친구들한테 되게 재밌는 일처럼 말했던 걸로 기억해요. 애들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얘는 남자가 좋대’, ‘어, 그래?’ 하고. “그럼 짝꿍 할 때 남자랑 해야 되는 거야?” “누가 앉아?” “난 여자가 좋은데.” “그럼 내가 할래. 난 순재 좋아.” 뭐 이런 천진난만한 대화가 가능할 정도였죠. 변함없이 어울릴 수 있었던 그 짧은 시기가 지금도 놀라운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단지 좀 특이한 친구, 새롭고 신기한 사실일 뿐 다들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문제라는 인식이 없었어요. 하지만 위기는 금방 찾아왔죠. 저를 맘에 안 들어 하던 중년 남자 담임선생님이 그걸 알고부터 혐오발언을 시작했어요. 게이로서 받은 최초의 공격이었어요.
해인: 그 선생님 반응이 어땠어요?
순재: 구체적인 사건과 말들은 지워지고 느낌만 남아 있어요. 잊고 싶었기 때문인지 생각이 잘 안 나요. 그 선생님뿐만 아니었겠죠. 친구들 부모님이며 다른 어른들도 그 얘길 들었다면 어떻게 반응했겠어요? 이거 문제구나, 뭔가 나쁜 건가 봐, 약점이구나, 아이들도 저도 금방 배우게 됐어요. 자라면서 양쪽의 태도 모두 천천히 변했고, 뒤늦게 침묵하려 해 봤자 소문이 다 퍼져 있었죠. 그 상태로 같은 동네 남중에 들어가면서 마음의 병이 깊어졌어요. 간혹 괴롭힘은 있었지만 심한 폭력이나 왕따까진 아니었고, 다가오는 친구들도 분명 있었는데 도리어 제가 밀어내고 스스로 외톨이가 됐어요. 점점 거칠어지는 남자애들의 사회 속에서 저는 언제고 무참히 거부당할 수 있는 존재란 게 두려웠던 거예요. 사회불안장애가 왔어요. 무애 이모 아드님처럼 학교 가면 엎드려 잠만 자고 길에서도 땅만 봤어요. 학원에는 아예 안 들어가고 화장실에 숨어서 변기에 몇 시간 동안 앉아있기도 했죠. 고등학교는 다른 지역으로 가서 비로소 비밀이 될 수 있었고, 기숙사 학교여서 사회성도 억지로 조금 길러졌어요. 하지만 그런 병적인 심리상태는 아주 오래 갔지요. 실은 아직도 다 극복하진 못한 거 같아요. 어려서 그만큼 억눌렸던 게 터져서 지금 이렇게 용기를 기르고 커밍아웃하는 일에 적극적인지도 모르겠어요.
무애: 우리 아이가 중2때였나? 커밍아웃을 했는데, 지금 열일곱이거든요. 아이가 선생님한테 ‘주의력 결핍이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 내가 봤을 때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거든요. 근데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뭔지를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엄마 쿨한 거 알지? 다 이야기해라.’ 하면서 이야기했어요. 애가 그래서 ‘엄마 나 사실 양성애자인 것 같아.’ 하더라구요. 근데 그때 너무 기뻤어요.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성소수자인 거니까. 그래서 ‘내가 볼 때는 너 게이인 것 같은데, 잘 알아봐라.’ 그랬어요. ‘여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냐?’ 그랬더니 아니래요. 그러면서 모든 의문의 답이 풀리는 거예요. 그게 너무 기뻤어요. 애 누나한테 조용히 ‘동생이 아무래도 성소수자인 것 같아’ 했더니 누나가 ‘걔 그럴 줄 알았어.’ 그러면서 끝났어요.
저는 근데 한편으론 한대 얻어맞은 줄 알았어요. 나는 ‘남자 여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근데 왜 난 그렇게만 배웠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편견이 있다고 뭐라고 할게 아니라, 누가 우리한테 잘 가르쳐 준 곳이 없었어요. 누가 말을 해 준 적이 없었어요. 아까 순재씨가 말한 3학년 때 선생님도 그런 교육을 받은 거예요. 전체적인 정보가 수정되어야 하는데, 이건 잘못됐는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아들한테 ‘기죽지마, 죄 지었어? 타고날 때부터 그런 거야. 너가 죄 지은거 아니야.’라고 해줬어요. 솔직히 내가 성소수자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성소수자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나 했어요. 근데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쁜 게 아니라 그런 교육을 못 받아서 그런 거예요. 그러다 이게 풀리려고 하니까 종교적으로도 저항이 있는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내 아이가 장난감도 총, 자동차 같은건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었고, 여자 인형 좋아하고 그랬어요. 아이가 커밍아웃을 하면서 마음이 편해졌어요. 고민이 해결된거죠. 모든 의문이 풀리니까. 그 전엔 인권엔 관심이 없었어요. 근데 보니까 이 편견 때문에 얼마나 많은 폭력이 일어나고 있을지 생각이 들더라구요.
티비에서 성소수자에 대해 이야기할 땐 마약, 에이즈 이런 거만 연관지어서 말하잖아요. 그래서 성소수자는 정신적으로 이상한 줄 알았어요. 저는 솔직히 성소수자인 아들을 만나게 되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들 덕분에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됐거든요. 우리 아들도 빨리 세상 밖으로 나와서 다른 성소수자들도 만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왜 몰라요? 내 자식인데 왜 몰라요? 엄마가 분명히 아는데, 인정을 안하는 거예요. 성소수자인 아들을 키워본 엄마는 알아요.
지인: 엄마들은 무지해서 ‘내가 끝까지 반대를 하면 바뀌지 않을까?’ 할 정도로 생각해요. 오히려 누구 한 사람이라도 편이 돼 줘야 하는데 그걸 모르는 거예요. 자녀 입장에 있는 분들은 커밍아웃을 했는데도 부모님이 반응이 없다고 서운하다고 그러는데, 부모들이 어떻게 할지 몰라서 그러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부모들이 왜 저 정도 밖에 안되지?’ 하지 마세요. 어떻게 할지 몰라서 그래요.
무애: 생각을 해봤어요. 가만히 내가 받아온 교육을 생각해봤어요. 남자, 여자,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 다 있는데, 왜 나한테 빼고 가르쳤지? 근데 그런 걸 새로 생각해야한다고 하면 외면하고 싶어져요. 오늘 아침에 모임에 나오면서 생각했어요. ‘나부터 잘해야겠다.’ ‘내가 이 집안에서 부모 노릇을 똑바로 해야겠다.’ ‘당당한 아이로 키워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더라구요.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왜 힘들어해야하지?’, ‘이런 게 인권 탄압이겠구나.’ 하면서 마음이 다져지고요.
제가 빛을 본 것 같아요. ‘왜 속였지 나한테? 왜 봉인을 시키지? 가둬두지? 아닌데?’ 지금은 오픈이 되고 그랬지만 예전엔 얼마나 많이 숨어 살았겠느냐 하는 거예요. 있었겠지 분명히. 왜 없었겠어요. 모두가 알고 있는 정보가, ‘그게 틀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빛을 보는 것 같아요. 한대 맞은 느낌. 총칼 들이대는 것만이 아니라 편견이 탄압이 될 수 있겠구나. 저도 요즘 인터넷을 보면, 자기가 성소수자이거나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가 이야기를 하면 믿겠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구요. 전 아들이 게이라서 힘들고 그런 건 없고, 오히려 고맙고, 좋은 파트너 만났으면 좋겠고... 따로 살림을 차려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어요.
스무 살 넘어가면 부모님 말 안 들어도 돼요. 엄마 아빠가 이해하든 말았든 이해 못하면 놔둬요. 그런 부모의 생각이라면 듣지 마세요.
어나더: 저는 재수를 했어요. 재수를 하는 도중에 부모님한테 밝혀졌거든요. 수능 백일쯤 남았을 때요. 부모님이 제가 공부할 때 전자기기를 만지는 걸 굉장히 싫어하세요. 저희 부모님이 경계가 없으신 분인데, 어느 정도냐면 제 이름으로 된 택배가 오면 그냥 뜯어보세요. 어렸을 때는 핸드폰 검사를 하려고 하신 거예요. 그래서 버텼더니 폴더폰을 두동강을 내셨어요. 그 정도세요. 어쨌든 8월에 제가 갖고 있던 공기계의 카톡이랑 블로그 앱를 다 보셨어요. 그 당시엔 수험생이라 넘어갔는데, 수능을 잘 못 봤어요. 그 후에 부모님이 ‘너가 수능을 못 본게 그런 사람들 만나고 블로그 하고 그래서 그런 거 아니냐.’ 그랬는데 이번 겨울에 굉장히 힘들었던 건, 부모님이 저를 계속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생각하게 됐어요. ‘아직까지 그 학교 다닐거냐. 올해는 수능 다시 안 볼거냐. 없는 형편에도 공부 시켰는데, 내가 너 이러려고 키운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세요. 지금은 잘 살지 않지만 예전엔 강남 팔학군, 영어 유치원 다니고, 집안이 기우는 상황에서도 이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으셨던 거예요. 그런 건 너무 감사하고 다 아는데, 지금 이러고 나서 보니까 내가 단순히 부모님의 투자 대상이었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풋에 비해 아웃풋이 안 나온, 실패한 투자대상으로 느껴지더라구요. 제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근데 저 자신도 계속 몇 년간 실패를 하면서 모든 종류의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거예요. 이게 단순히 부모님이 무지해서 오는 문제가 아니고 근본적으로 이미 관계가 깨졌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에요.
지인: 부모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자기 감정이 어떤지 말한 적 있어요?
어나더: 말한 것 같아요. 저희 어머니가 불도저같은 분이라 저도 맞서지만 결론은 제가 개새끼가 되더라구요. 얼마 전엔 너는 나이가 들수록 한심해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땐 정말 아닌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지금은 독립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제가 나이가 21살인데 아직도 외박을 못해요. 작년 겨울에 게이 클럽에 처음 갔는데, 엄마가 밤에 제가 집에 없는걸 알고 전화가 온 거예요. 어디냐고 그래서 제가 교대에 있는 술집에 있다고 둘러댔는데 거기 전화해보신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외박이 금지됐고. 그래서 관계를 다시 돌아보고 커밍아웃을 다시 할지 고민 중이에요. 블로그도 간간히 다 보고 계신 거 같아요.
무애: 그럴 땐 집을 나가면 될 것 같아요. 가출이 아니고, 새가 둥지에 있다가 때가 되면 비상을 시켜야 하는게 애미잖아요. 지금 게이로서 행복하죠?
어나더: 네.
무애: 자식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부모에요. 부모 욕심이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죽을 때까지 가요. 자식을 억압하고 고통을 주고 있잖아요.
어나더: 제가 걱정되는 건 기숙사로 나오고 그 이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지금은 덮어놨는데 다시 까발려야 하는지.
지인: 제가 상담심리사여서 상담을 많이 하는데, 자식이 1등하다가 지금은 게임만 한다고 힘들어하는 엄마가 있었어요. 근데 이 엄마는 애가 99점 맞아왔을 때 100점 못 받았다고 혼냈던 엄마에요. 그때 혼났을 때 애 기분이 어땠을지 생각을 해봐야 하는데 그런 엄마는 자기 힘든 것만 알아요. 저도 애가 커밍아웃 했을 때 아이가 힘든 건 생각 안 나고 힘들게 키웠는데 나한테 왜 이러나 하는 생각만 했어요. 지금도 그게 제일 후회돼요. ‘자식 힘든 줄도 모르고 좋은 엄마인 줄 알았구나’. 아이가 자기 힘든 걸 좀 말해줬으면 그렇게 심하게 하진 않았을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해요.
무애: 부모님들이 다 그소리 하세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우리 아이 똑똑하지 않았던 아이 없구요. 저도 우리 큰 딸을 예고를 보내봤고, 똑같은 엄마로 가다가 우리 아이가 게이인데 학교에 갔다 오니까 고통에 쩔어있는 걸 보면서 쟤는 지금 숨을 못 쉬고 있는데, 아이가 고통을 받아 있으면 같이 가주는 게 엄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도 그런 생각 들어요. 힘들 때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지가 나오고 싶어서 나왔나? 내가 낳고 싶어서 낳았지. 근데 부모들이 그런 생각을 못해요. 제 생각엔 부모들이 이해 못할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내 인생 버릴 수 없잖아요. 성소수자들 보면, 너무 위축되어 있고 웅크려져 있어서 날개를 못 피고 죽는 것 같아요. 우선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세요.
라라: 저라면 오히려 자식이 사람들 만나고 다니면 좋아할 것 같은데.
지인: 아직 게이라는 걸 인정을 안 하셔서 그런가봐요.
( 휴식 )
수환: 곰님이 새로 오셔서 소개를 받으면서 2부를 시작할까요?
김곰: 만화 그리고 있고, 성소수자는 아니고 성소수자를 알아가는 과정으로서 작업을 하고 있고, 저도 만나면서 게이바도 가 보고 문화도 보고 있는데 저 자신도 일차적으로는 편견이 있는 거잖아요. 다른 존재로 바라보게 되고, 쉽게 듣는 정보라는건 편견에 쌓인 정보가 많은것 같아요. 저도 보편적인 교육을 받아왔잖아요. 정욜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이 주제에 대해 알기 시작했어요.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중학교 때도 다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는데, 그 대응방식이 부정적이지 않았나 싶기도 하구요. 작년에만 해도 인턴이 자기가 레즈비언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나이가 아직 어리지 않냐고 말했었거든요. 언젠가 만나면 사과하려고 생각중이에요. 성소수자 활동가들 이야기를 그리다가 다음번에는 초등학교 교사, 목사인 성소수자를 다뤄보고 싶고, 트랜스젠더나 성소수자의 부모님들도 다뤄보고 싶어서 오늘 여기 오게 됐습니다.
오소리: 순재 씨는 어렸을 때 커밍아웃하고 한참 지나 재차 커밍아웃을 한 거잖아요? 두 번째로 했을 때 반응이 어땠어요?
순재: 어나더 님 경우처럼, 특히 가족 간에 할 때엔 환경과 관계 안의 다른 문제들과 분리되기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저도 엄마와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있을 때 싸우다가 말했어요. 다른 일들과 뒤섞인 채 거칠고 감정적이었죠. 아까 말했듯이 첫 번째 커밍아웃이 굉장히 절박한 상태에서 털어 놓은 거였잖아요? 구조요청이었단 말이죠. 근데 그때 엄마가 외면했던 게 분노와 원망을 몇 배로 키웠어요. 당신이 이래서 저래서 밉다는 말을 퍼부으며 8년 묵은 얘길 터트리니까 충격과 상처가 아주 크셨죠. 죄책감이 가중된 혹독한 감정 속에서 한 일주일 식음을 전폐하고 죽을 것처럼 우셨어요.
지인: 제가 아까 부모한테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랬잖아요. 그게 왜냐면 당사자들도 자기 정체성 고민하는데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그만큼 부모한테도 필요해요. 저는 부모들이 겪는 과정을 전형적으로 겪었어요. 저는 수용하기까지 1년 반 정도 걸린 건데 미국 사이트에서 보니까 평균적으로 2년 넘게 걸린대요. 전에 다른 분이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하는 방법 생각한 것 중에 좋다고 생각한 게, 부모가 겪는 과정 순서도를 보여주면서 ‘엄마 지금 이 단계야’ 하는 거예요. 저는 그런 정보가 없어서 정말 혼란스러웠거든요.
순재: 맞아요. 하지만 전 그런 사려 깊은 행동은 미처 할 줄 몰랐죠. 엄마가 처음 그때 왜 그랬는지, 그간 어떤 상태였는지 헤아리지를 못했어요. 정확히는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를 안 했죠. 원망만 불태우면서. 엄마도 못 들은 걸로 하겠다고, 다신 그딴 헛소리 말라고 하셨지만 그게 어떻게 잊어졌겠어요? 8년 내내 괴로웠겠죠. 두 번째 커밍아웃 했을 땐 생뚱맞게 별로 가깝지도 않았던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을 만나 상담을 했다더군요.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었단 거예요. 첫 번째 했을 때는 누구한테? 이모들한텐 말해 봤을까? 얼마나 고독하고 무서웠을까? 분명 나 만큼이었을 건데, 그땐 그렇게 못 느꼈어요. 살벌하게 책망을 했죠. 날 그렇게 방치했고 아무 힘이 못 되어 줬다며, 그날 이후 엄만 나한테 남보다 못한 존재였다고.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표현을 많이 썼어요. 며칠 폐인처럼 지내신 뒤에, 먼저 제게 용서를 빌면서 대화를 이으셨고, 저도 그제야 마음이 풀려서 정말 하려고 했던 말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괜찮다고. 그걸 알고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많아 행복하고 씩씩하게 살 자신 있다고.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앞으론 엄마도 함께 용기를 내 달라고. 사실은 저도 사랑한다고요.
근데 재밌는 건, 게이라는 것에 대해 그날 이후 서로 한 마디도 않기는 두 번 다 마찬가지라는 거. 두 번째 말한 것도 벌써 4년이 지났는데, 그간 추가적인 피드백이 전혀 없었어요. 아직까지도 그간 엄마의 심경변화라든가 현재의 입장, 관점, 이해도, 소망 등에 대해 전혀 모르겠어요. 엄마의 경우 그때의 감정소모가 트라우마로 남아서 하고 싶은 말이 생겨도 꺼낼 엄두를 못 내시는 것 같고, 그 표독스러웠던 저도 왠지 다시 무슨 언급을 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새삼 할 말이 더 없기도 해요. 이제 다음 단계는 제 사랑이 얼마나 행복하고 튼튼한지 보여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제가 아직 그 점에 자신이 없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연애가 계속 실패하고만 있거든요.
요즘 와서야 후회와 책임감을 느껴요. 제가 나서서 묻거나 답해주고, 뭘 보여 드리고, 어딜 모시고도 가고, 그런 후속작업을 이어가면서 엄마의 지난 시간들을 살펴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서요. 저는 그사이 세상에 문을 열고, 사람들 만나면서 용기를 얻고, 그렇게 조금씩 강해지면서 밝게 살고 있는데 엄마는 그때 제가 어떤 새장에 집어넣고는 혼자 내버려둔 게 아닐까, 역으로 이번엔 내가 방치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요.
셈해 보니 깨닫고부터 엄마한테 말하기까지 5년, 다시 말하는 데 8년, 그리고 또 4년 지났네요. 너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엄마의 마음을 잘 돌봐 드리고 싶어요.
지인: 밈님은 어때요?
밈: 저는 어나더님이랑 비슷해요. 저도 재수했는데 학원집 학원집 하면서 살다가 재수 했는데 약간 엄마 성에 안 차게 되서 한번 더 하라고 1년 정도 더 그랬어요. 근데 저는 일단은 스물 여섯인데 지금도 외박을 못하는데, 그래서 저는 어나더씨가 외박을 빨리 뚫었으면 좋겠구요. 저는 대학가서 부모님이 절대 하지 말라는 학생운동을 해가지고 전에 한번 연행되서 36시간 구치소에 있었던 적이 있어서 어디 간다고만 하면 집회 가냐고 하시고. 학생운동을 하면서 느낀 게, 사람이 바뀌는데 시간이 정말 많이 걸리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커밍아웃을 할지말지부터 고민이고, 서른 살 넘어서 직장을 잡고 부모님이 뭐라고 해도 제가 흔들리지 않을 상태가 되었을 때 하려고 하고. 집에선 무성적인 존재로 비춰지고 있어요. 밑밥을 많이 깔고 있어요. 결혼 안 할거니까 축의금 내고 다니시지 말라고. 여러 번 기대를 깼더니 잡고 있던 걸 많이 놓으셨어요. 저는 전공이 철학이어서 사람에게 말하는 방식을 많이 고민해야하는 과여서, 저는 외박을 포기하는 대신에 부모님한테 확실히 얘기를 했어요. 한번은 내가 돈으로 보이냐고 성질을 내니까 며칠 있다가 미안하다고도 하시고. 제가 외박을 포기하면서 과외를 하면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내가 독립은 안하는데, 독립을 안 하는 이유는 학교 다니면서 청소 빨래 못해서 그런 거라고 했더니 만족하시면서 납득을 하신 것 같아요. 그러면서 서로의 기대치가 조금씩 낮아졌던 것 같고. 그럼에도 스물여섯인데 외박을 못하는 게 불만이에요.
라라: 따로 살면 부모님도 편할 거예요(웃음)
[소감]
무애: 저번 모임 끝나고 나서 아이한테 그랬어요. “너의 문제는 게이 친구가 없는 것이다!” 우리 아이도 여기 데리고 나오고 싶어요. 아참,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어요. 애한테 “이제 집에선 편하게 있어라”, “너가 나오는 대로 해라”고 했더니... 손이... 손목을 그렇게 꺾어요. 그리고 미용에 그렇게 신경을 쓰나요?
해인: 화장품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아요. 저한테도, “이모, 이건 지방이 많아서 안돼”, “이모, 이건 이래서 좋아”하면서 하나하나 다 설명해줘요.. 질문 하나 또 있어요. 조카를 일주일에 몇번 보는데, 사춘기라서 그런지, 문을 닫고 사는 경우가 많아요.
모두: 사춘기라서...
라라: 아니, 문을 당연히 닫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해인: 저도 아들이 있어요. 근데 유독 닫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궁금했어요.
순재: 저는 아줌마들이랑 잘 놀아요. 되게 좋아해요. 근데 이런 얘기 나눌 수 있는 아줌마 친구가 없었어요. 이렇게 이모들하고 수다 떨 수 있는 환경을 만나서 너무 감사해요.
무애: 제가 친구사이 게이 부모님 모임하고 여기도 참석해보니까, 일단은 부모와 자식이 같이 앉아서 그 자리에서 주고받을 수 있으니까 너무 유익하고, 소통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앞으로 적극 협조하고 싶어요.
라라: 토크쇼 같은 형식으로 사람들 많이 초대해서 행사 같은 것도 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순재: 제가 엄마에게 커밍아웃했을 때만 해도 이런 공개적인 모임이 없었거든요. 부모님 가이드북도 없었고. 지금은 이런 게 생겨서 참 좋고, 엄마의 잠재적인 친구 분들이 모여 있다는 생각에 반가워요. 이 조직이 더 커지고 잘됐으면 좋겠어요. 바성연, 또 무슨 참교육어머니회?(성소수자 차별, 혐오를 선동하는 단체들) 그딴 모임들만 있는 거 아니잖아요. 대항마로 성장할 수 있길 바라요.
무애; 자식들이 훨씬 지혜로운 거예요. 부모들이 훨씬 숨어있는 것 같아.
순재: 손잡고 이끌어 드리는 것이 자녀들의 책임인 것 같기도 해요.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