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문] 봄바람과 함께 떠나는 소풍,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 오픈마이크 (2023.04.01)
애니(성소수자부모모임 운영위원, 트랜스젠더 부모모임)
안녕하세요. 저는 29살 트랜스젠더 딸을 둔 애니라고 합니다.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을 맞아 여러분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 딸은 지금 캐나다에서 자신의 반려자와 함께 잘 지내고 있어요. 사위라고 해야겠죠? 저희 딸은 사위를 한국의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서 만났어요. 지금은 직장 다니면서 여느 부부처럼 평범하게 잘 지내고 있답니다.
하지만 이렇게 평범하게 잘 지내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딸에게 처음 커밍아웃 받았을 때는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이 세상을 도저히 살아낼 수가 없을 거 같았습니다. ‘아이와 함께 죽어야 할까?’ 하는 나쁜 생각까지 들 정도였어요. 돌이켜보면 이게 우리 사회가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때까지 살면서 트랜스젠더에 대해서는 해봤자 ‘하리수’ 정도 들어봤을 뿐 경험해보지 못했고, 게다가 시스젠더 헤테로만 정상으로 여기는 이 사회에서 그로부터 벗어난 존재는 비정상으로 여기니까요. 아이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이 믿어지지도 않고, 트랜스젠더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내는지 도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절망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트랜스젠더 가시화라는 게 상당히 중요한 일인 거 같아요. 제 딸이 지금 살고 있는 캐나다와 한국을 비교해보자면, 한국에서는 성별 표현이 모호하거나 논바이너리인 사람을 두고 수근거리며 이상하게 바라보지만, 캐나다에서는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인식하고 평범한 시민으로 대해주더라고요. 매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법-제도적으로도 권리를 일정 보장해주고 있으니, 트랜스젠더도 동료시민으로 충분히 살 수 있는 것이죠.
우리 딸이 학교 다닐 때는, 소위 말하면 겉모습만 보고는 성별을 특정하기 어려운 아이였어요. 그런데 담당 교수가 우리 딸에게 “나는 he로 불리기를 원하는데 너는 뭐로 불리기를 원하니”하고 먼저 물어봐 주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식당이든 마트든 불특정한 사람들을 마주치게 될 때도 성별을 특정하기 어렵거나 할 때는 중립적인 표현인 they라고 불러준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실례는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외양이 좀 더 눈에 띄고 트랜스젠더라는 소수자성을 지니지만, 그뿐이지 그저 다를 거 없는 ‘일반 사람’ ‘보통 시민’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거지요. 그게 참 중요한 거 같아요. 그냥 ‘이런 사람들도 있지’, 하는 단순하다면 단순한 생각 말이에요.
물론 혐오적인 사람들도 있겠죠. 하지만 캐나다 인권법, 그러니까 차별금지법 같은 장치들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막 대놓고 혐오는 못 하겠죠. 그래서 우리나라도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한 여러 법-제도들이 어서 마련되었으면 좋겠어요. 지난번에는 캐나다에 다녀 왔는데, 유명한 커다란 몰에 있는 화장실이 성중립 화장실로 바뀌었더라고요. 남자용 소변기는 없애고 좌변기 칸이 많이 있었어요. 성별 구분 없이 모두 같이 줄을 서고 세면대도 같이 쓰고 하는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고 오히려 더 편하고 안전하고 좋더라고요. 연인도 같이 줄을 서고, 애기도 부모가 같이 데리고 들어갈 수 있고 말이에요.
사람은 적응이 빠른 존재라고 하잖아요. 막상 불편할 것처럼 여겼던 게 특정한 계기로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것으로 생각보다 금방 인식이 뒤바뀌는 거 같아요. 우리 딸과 사위 그리고 여기 계신 트랜스젠더 당사자분들도 당장은 차별과 혐오, 법과 제도의 부재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세상은 분명 좋은 쪽으로 생각보다 빠르게 바뀌리라 믿어요.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누구나 오롯한 자신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세상이 빠른 시일 내에 꼭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오늘의 발언 마치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